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조의 서주 침공 (문단 편집) === 조조의 1차 침공 === 이에 [[조조]]는 [[도겸(삼국지)|도겸]]을 공격한다. >초평(初平) 4년 (AD 193)에 조조(太祖)는 도겸을 정벌하고 십여 개의 성을 공격하여 취했으며, 팽성(彭城)에서 도겸과 크게 싸웠다. 도겸의 군대는 패한 후 도주하였는데, 죽은 자의 수가 수만 명이나 되었으며, 사수(泗水)는 시체로 막혀 물조차 흐르지 않았다. 도겸은 물러나 담현(郯)을 지켰다. 조조는 양식이 부족하였으므로 병사들을 이끌고 돌아왔다. > >''조공(曹公)의 부친이 도겸의 관할하에 있던 태산(泰山)에서 살해되니, 그 허물은 당연히 도겸에게 돌아갔다. 태조는 도겸을 토벌하려고 생각했으나 그가 강대한 힘을 가지고 있음을 알고 두려워했다. 그래서 그는 도겸의 주와 군의 군대를 일시에 해산시키도록 할 것을 상주했다.'' > >''태조가 팽성(彭城)으로 진격하여 많은 사람들을 죽이자 도겸이 군대를 이끌고 와서 저항하였고, 청주자사 전해(田楷)가 와서 도겸을 구하려고 하니 태조는 군대를 이끌고 돌아왔다.'' - 「오서」[* 「무제기」에 따르면 193년 가을에 조조가 서주로 갔고 『자치통감』에 따르면 193년 6월이다. 또 「무제기」에 따르면 조조가 서주에서 본거지인 돌아온 때는 194년 봄, 『자치통감』에서는 194년 2월이다.] > >''신 송지의 의견으로, 이때 천자는 장안에 있었고, 조공이 아직 정무를 장악하지 않았을 때이다. 파병(罷兵)의 조서는 조씨로부터 나올 수 없다.'' >---- >『삼국지』 「도겸전」 >태조가 도겸(陶謙)을 정벌할 때, 자기 집안에 일러두길 "만약 내가 돌아오지 못한다면 맹탁에게 가서 의지하라"고 했다. 후에 돌아와 맹탁을 만나고서는 서로 마주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 친밀함이 이와 같았다. >---- >『삼국지』 「장막전」 >서주 정벌에 종군하였는데, 조인은 항상 기병을 지휘하여 군의 선봉이 되었다. 따로 도겸(陶謙)의 장수 여유(呂由)를 공격하여 이를 격파하고, 돌아와 팽성(彭城)에서 대군과 합류하여 도겸군을 대파했다. >---- >『삼국지』 「조인전」 >가을, 태조가 도겸을 정벌해 10여 성을 함락시켰으나 도겸은 성을 지킬 뿐 감히 나오지 못했다. > >(중략) > >흥평(興平) 원년(194년) 봄, 태조가 서주(徐州)에서 돌아왔다. 당초 태조의 부친 조숭은 관직을 떠나 초(譙)로 돌아갔었는데 동탁이 난을 일으키자 낭야(瑯邪)로 피난했다가 도겸에게 해를 입었다. 이 때문에 태조는 원수를 갚기 위해 동쪽을 정벌한 것이다. >---- >『삼국지』 「무제기」 >태조(조조)가 당도하여 사수(泗水)에서 남녀 수만 명을 갱살(坑殺)하니 이 때문에 강물이 흐르지 못했다. 도겸이 그 군사를 이끌고 원무(팽성 원무현)에 주둔하자 태조는 진격할 수 없었다. 군사를 이끌고 사수 남쪽을 따라 취려, 수릉, 하구의 여러 현들을 공격해 모두 도륙하니, 닭이나 개조차 다 없어지고 폐허가 된 읍에는 다시는 행인을 볼 수 없을 정도였다. >---- >「조만전」 >한나라 초평(初平) 4년, 조조가 도겸을 쳐서 팽성의 부양(傅陽)을 격파했다. 도겸이 담성(郯城)으로 물러나 지키니, 조조가 이를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고, 이에 되돌아갔다. (조조는) 지나는 길에 있던 추려(取慮), 저릉(雎陵), 하구(夏丘)를 함락하여 모두 도륙(屠戮)했다. 무릇 남녀 수십 만 명이 살육(殺戮) 당했고, 닭이나 개도 살아남은 것이 없었으며, 사수(泗水)는 이들의 (시체) 때문에 (막혀) 흐르지 못하였다. 이로 인하여 다섯 현의 성읍(城保=城堡)[* 『후한서』에 주석을 단 혜동(惠棟, 1697~1758)이 말하길, “정현(鄭玄)이 말하기를 '작은 성(城)을 보(保)라 한다.'”]에는 사람의 종적이 다시는 없었다. 처음에 삼보(三輔)[* 사례교위부 경조윤, 우부풍, 좌빙익을 말한다.]가 이각(李傕)의 난을 당하니, 백성들이 이리저리 떠돌다가(流移) 도겸에게 의탁하였는데 모두 (이 때) 다 죽었다(殲).[* 혜동이 말하기를 “또 배송지(裴松之)는 '생각건대 손성(孫盛)이 이르기를 무릇, 죄지은 자를 쳐서 백성을 위로하는 것은(伐罪弔民) 예부터 (내려오는) 규범으로, 도겸이 죄를 지었다 하나 그 부속(部屬-딸린 사람들)까지 죽인 것은 잘못이다.'라 했다.”라고 하였다.] >---- >『후한서』 「도겸열전」 >(초평 4년) 가을, 조조가 군사를 이끌고 도겸을 공격해 10여 성을 함락시키고 팽성에 이르러 크게 싸웠는데, 도겸군이 패하자 달아나 담현을 보전했다. 당초, 경(京, 장안), 락(雒, 낙양)에서 동탁의 난을 만나자 백성들이 유이(流移-유망, 유랑)하여 동쪽으로 나와 서주 땅(徐土)에 의탁한 자가 많았는데, 조조가 당도하여 남녀 수만 명을 사수에서 갱살하니 이 때문에 강물이 흐르지 못했다. 조조는 담현을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이내 떠나서 취려(取慮), 수릉, 하구의 여러 현을 공격해 차지하고 이들을 모두 도륙하니 닭이나 개조차 다 없어지고 폐허가 된 읍에는 다시는 행인을 볼 수 없을 정도였다. >---- >『자치통감』 조조가 일단 도겸의 세력이 강한 것을 봐서 외교전을 시도했다는 일화까지 나올 정도로 조조는 도겸을 이기기 어렵다고 보고, 친족을 진류 태수 [[장막#s-2|장막]]에게 부탁했다. 출진한 조조는 [[조인]]의 기병대를 별동대로 삼아 도겸군을 격파하고 10여 개 성을 함락시켰다. 그 후 조인의 기병 별동대와 합류한 뒤 팽성으로 진격하여 많은 인민들을 죽였고(多殺人民) 이를 막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나온 도겸과 전투를 치뤘다. 도겸은 대패해 정사에 따르면 수만명의 사상자를 내고 퇴각했다. 기가 죽은 도겸은 함부로 나오지 않고 성을 굳게 지켰다. 이듬해 봄까지 이어진 장기간의 원정이었기 때문인지 조조는 양식이 부족해졌고, 청주자사 [[전해]]가 구원군으로 내려오고 있었기에 조조는 결국 퇴각한다. 이때 조조군은 퇴각하면서 취려, 수릉, 하구 등 다섯 고을을 도륙한다. 문제가 되는 건, 「조만전」에서 팽성국 원무현으로 후퇴했다고 말하는 부분이다. 진수의 『삼국지』에는 담현으로 후퇴했다고 되어 있다. 다만 지명 오기 같은 건 충분히 벌어질 수 있는 일이다. 자치통감은 삼국지와 후한서에 나온대로 담현으로 후퇴했다고 기록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